지난 196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허원근 일병은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1983년 육군에 입대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허 일병은 강원도 화천 육군 7시단에 자대 배치를 받고 복무하다 1년 후인 1984년 4월2일 오후 1시20분쯤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허 일병은 7사단 GOP 철책근무지 전방소대 폐 유류고 뒤에서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총기는 당시 육군 장병에게 보급된 M16이었다.
허 일병은 왜 죽었을까. 7사단 헌병대에서 수사를 맡았고, 얼마 후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자살자가 머리와 가슴 등 총 3발을 쏠 수 있을까. 헌병대는 허 일병이 처음에는 오른쪽 가슴을 쏘고, 두 번째는 왼쪽 가슴을 쐈으며,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오른쪽 눈썹에 밀착해 한 발을 더 쐈다고 밝혔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두개골 파열’이라고 했다. 자살 동기는 ‘소속 중대장의 이상성격에 의한 혹사를 비관한 것’이었다. 허 일병의 유족은 ‘자살’이라는 군 발표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단 자살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자살자는 자살 전에 징후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허 일병은 그런 것이 없었다.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는 “내 아들이 자살할 이유가 도무지 없다. 열심히 일하며 공부도 잘했다. 자살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고 말한다.
중대장 “아버님, 저도 피해자입니다”
군에서 발표한 자살동기도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추정이다. 허 일병의 아버지는 나중에 군에서 자살동기로 밝힌 해당 중대장을 찾아가서 만났다. 그는 허 일병의 아버지를 만나 “아버님, 저도 피해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1998년에 사망했다.
허 일병의 유족은 정부 측에 탄원서와 진정서를 수도 없이 냈다. 계란에 바위치기였다. 그러다 희망의 불씨가 살아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후 대통령 소속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2001년 6월 유족의 진정으로 의문사위가 조사에 착수했다. 1기 의문사위는 2002년 9월 허 일병 사건을 조사한 후 자살이 아닌 ‘타살’로 결론을 내렸다. 허 일병 사건이 터진 지 18년 만이다. 아래는 의문사위 조사 결과다.
육군 제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 간부인 장교 2명과 하사관 1명은 1984. 4. 1. 늦은 저녁부터 술자리를 가졌으며, 술자리 도중 김○○과 노○○이 말다툼을 했다. 당시 헌병대 수사기록 및 참고인 노○○, 오○○, 이○○, 전○○, 이○○, 신○○, 우○○(당시 노○○ 전령)의 각 진술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1984년 4월1일 저녁(자정 전후로 추정됨)부터 다음날 새벽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16소초장 장○○이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김○○, 장○○, 노○○은 중대본부 중대장실에서 진급 축하 술자리를 가졌다. 중대장 김○○의 전령이었던 허원근 일병은 안주를 준비하는 등 뒷바라지를 했다.
허 일병은 술자리 도중 안주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중대장실에서 중대장 김○○으로부터 질책과 함께 구타를 당했다. 이후 계속된 술자리 와중에 술에 취한 상태였던 선임하사 노○○이 중대장 김○○에게 철책 근무에 투입되기 전에 ○○○주점에서의 중대장의 접대부 취급을 지적한 것을 이유로 김○○과 노○○은 말다툼을 했으며 화가 난 노○○은 중대장실 문을 박차고 내무반으로 뛰쳐나왔다.
술에 취한 선임하사 노○○는 사병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책상 등을 걷어차고 허원근, 오○○, 손○○를 발로 걷어차는 등 사병들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손○○가 노○○을 말리자 노○○이 손○○를 밀어버리고 나서는 실탄이 들어 있는 탄창이 삽탄되어 있었던(노○○은 19소초에서 중대본부로 이동할 때 철책인 관계로 실탄이 들어 있던 탄창을 삽탄한 채로 소총을 들고 이동했으며, 중대본부에서 탄창을 빼지 않았다) 자신의 M16 소총을 들었다.
자신의 소총을 든 노○○이 중대장실 앞에 대기하고 있던 허 일병을 개머리판으로 찍자 허 일병이 팔을 들어 막았으며 그러자 노○○이 총 쏘는 자세를 잡고서 죽인다고 고함을 쳤다. 그 순간 총이 발사됐고 총에 오른쪽 가슴을 맞은 허 일병은 쓰러졌으며, 오○○과 신○○이 쓰러진 허 일병을 살펴봤다. 그리고 노○○은 겁먹은 표정으로 한동안 총을 양손으로 잡고 팔을 내려뜨린 상태로 서 있었다.
14소초원 김○○는 "그리고 나서 자살로 은폐하려고 시체를 중대본부 내무반 밖으로 옮겨 ○○○이 2발을 더 쐈으며 물청소를 했다”고 진술했다.
허 일병이 첫발을 맞은 후(04:00∼06:00 사이로 추정) 중대장은 대대 상황실로 허원근이 자살했다고 보고하는 등 사건을 은폐했으며, 사건 소식을 접한 대대장 등이 아침(06:00∼07:00 사이로 추정)에 중대본부로 온 이후 역시 사건 은폐가 계속됐다.
19소초원 권○○, 정○○의 진술에 의하면 노○○은 사건 전에도 흥분한 상태에서 사병들 발 밑에 총을 발사해 그 파편이 사병 눈에 박혀 부상을 입힌 적도 있었다. 그러나 노○○은 ‘당시 자신이 총을 들고 행정반에서 난동을 부린 것은 기억이 나지만 총을 발사했다는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이○○ 및 전○○를 제외한 사람들은 허 일병이 총에 맞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참고인들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했지만, 의문사위는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본 결과 허원근 일병은 ‘타살됐다’는 결론을 냈다. 이후 헌병대 수사과정에서 부대 간부들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사망 현장과 시간, 중대원들의 알리바이 등을 조직적으로 조작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의문사위 '타살' 발표에 국방부 '자살' 반박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국방부는 의문사위가 사건 결과를 날조했다며 군 검찰과 헌병대 등으로 ‘국방부 특별진상 조사단(특조단)’을 꾸렸다. 두 달 뒤 특조단은 조사결과를 발표했는데 의문사위와는 정 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특조단에 따르면 허 일병이 오전 일과를 시작한 뒤 오전 9시50분에서 1시간10분 동안 스스로 3발을 쏴 자살했다는 것이다. 2기 의문사위는 다시 허 일병 사건을 조사했고, 2004년 6월 은폐 주도세력이나 실탄 발사장면을 목격한 결정적 증인을 규명하지 못한 채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판정을 내렸으나 "타살은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그사이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허원근 일병 의문사 조사과정에서 당시 국방부 특조단 출신의 인 아무개 상사의 총기 발사 논란이 그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국방부 특조단은 의문사위에 허 일병 조사 자료 일체를 요구했고, 의문사위는 자료를 넘겨준다. 2003년 10월28일 의문사위도 특조단에게 조사 기록 송부를 요청했지만 특조단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의문사위가 재차 자료 요청을 하자 특조단은 같은 해 11월20일 일부 자료만 공개했다. 하지만 특조단이 내놓은 것에는 핵심 자료가 누락돼 있었다. 얼마 후 특조단은 의문사위에 추가 자료를 건넸지만 여기에도 허 일병 사건의 핵심 단서가 되는 자료들은 없었다.
인 상사 '총기 발사 논란'에 숨은 진실은?
국방부 특조단의 인 상사는 허원근 일병의 총기번호가 수정됐다는 것을 처음 밝혀낸 인물이다. 의문사위는 인 상사가 나름대로 사실을 밝히려는 의지가 있다고 보고, 그와 접촉했다. 그리고 의문사위 정은성 조사관은 인 상사를 통해 그가 특조단 내부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 조사관은 인 상사에게 자료 제공을 요청했고, 인 상사는 자신의 집으로 함께 가서 주요 자료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인 상사는 의문사위에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인 상사는 얼마 후 태도가 180도 바뀐다. 의문사위는 인 상사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인 상사 집을 찾아가 자료들을 가지고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인 상사가 의문사위 조사관에게 총(가스총)을 겨누고 실제 발사하며 저지했고, 자신은 자해 시도를 하며 자료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의문사위는 인 상사에게 자료를 돌려줬다. 그 자료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있었기에 인 상사는 총까지 쏘며 저항했을까. 국방부 특조단은 ‘허 일병이 자살했다’고 밝혔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의문의 자료’ 들도 공개하면 됐을 것이다.
2004년 7월 의문사위는 기자회견을 열고 “국방부가 사건의 재 은폐 시도를 했다”고 주장했다. 특조단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 등을 확인한 결과 2002년의 헌병대와 특조단 조사는 모두 날조라고 주장했다.
2기 의문사위 "국방부 특조단 조사 날조" 주장
당일 오전에 3발의 총성을 들었다는 주변인물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의문사위는 또 군 당국이 허 일병의 총기번호가 수정됐다는 의혹과 사체가 옮겨졌다는 미국 강력범죄 담당 경찰의 분석, 발견된 탄피 2개를 3개로 늘였다는 의혹 등을 덮어놓고 이 사건을 자살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본질은 국방부 특조단이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을 재조사하면서 미리 수사 방향을 정해놓고 끌고 가는 등 재 은폐한 사실이 있다.
둘째, 허원근 일병이 자살당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총기의 총번이 수정돼 허 일병의 총기로 볼 수 없다.
셋째, 당시 참고인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허 일병의 시신에 3발의 총을 맞은 것이 사실인데도 사건당시 참고인들은 일관되게 2발의 총성만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이것은 법의학자들이 주장하는 사망 후 시신이 옮겨졌고,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누군가가 옮겨진 폐 유류고 뒤편에서 2발의 총을 더 쐈다는 점이 부분적으로 입증됐다.
넷째, 자료입수과정에서 정수성 1군사령관(전 국방부 특조단장)이 의문사 조사관들에게 한 ‘언론 발표하기 전에 사전에 알려 주지 않으면 당신들 다 죽는다’는 협박 발언과 전 국방부 특조단 수사관 인 아무개 상사가 공무집행중인 의문사 조사관들에게 자료를 되돌려 달라며 '총기로 협박'한 사실 등 심각하게 조사를 방해한 적이 있다.
유족 국가 상대 손해배상 1심 '타살' 2심 '자살'로 뒤집혀
허 일병의 유족은 2010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타살로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렸고, 국가는 유족들에게 9억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달랐다. 서울고등법원 민사9부(부장 강민구)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자살’로 판결했다. 다만 헌병대의 수사 부실로 30년간 의문사로 남았던 것에 대한 위자료만 인정돼 국가는 유족에게 3억 원만 지급하라고 했다. 1심보다 배상액 6억 원이 줄었다.
허 일병 의문사 사건은 이렇게 결과가 자살과 타살을 번갈아 가며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허 일병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2015년 9월 "허 일병의 타살·자살 여부를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면서 군 수사기관의 부실 조사에 대해서만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고, 지난해 12월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이로써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상규명은 미완으로 남았다.
2017년 2월15일 국민권익위원회는 허 일병의 아버지가 제기한 고충민원에 대해 허 일병의 사망은 공무관련성이 있다면서 순직을 인정하라고 국방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권익위는 "군 복무 중인 장병이 영내에서 사망한 경우 국가가 그 원인을 명백하게 밝혀야 하며 부실한 조사로 원인 규명이 불가능하게 된 것은 국가가 적법한 절차를 위반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망의 형태나 방법이 분명하지 않아도 사망에 공무관련성이 있다면 순직을 인정해야 한다"며 "허 일병이 GOP(일반전초) 경계부대에서 복무 중에 영내에서 사망했으므로 공무와 관련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공무관련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국방부는 허일병이 사망한지 33년 만인 2017년 5월16일에 순직으로 인정했다.
비록 허 일병이 순직으로 인정돼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지만, 그의 죽음과 관련한 진실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풀리지 않는 의문점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는 허원근 일병 사망에 대한 의문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M16소총의 화력을 고려할 때 세 군데의 총상의 거리가 너무 멀다.
2. 허 일병이 M16으로 3발을 쏴 자살했다면 사체 주위에는 다량의 피가 흘러있어야 한다. 하지만 헌병대 수사기록에 있는 현장 사진에서는 핏자국이 전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을 경우 사체 주위에 피나 골편, 뇌 조직이 산재해야 하는데 현장 사진에는 이것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것을 보면 허 일병은 다른 곳에서 사망한 후 사체가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다.
3. 또 자살했다면 총에 피가 묻어야 하는데 총에 피가 보이지 않는다.
4. 총상의 각도를 볼 때 땅에 총을 대고 쏴야 하는데 총 개머리판에 흙이 보이지 않는다.
5. 허 일병이 자살하려고 했으면 단 번에 숨이 끊어지는 방법을 택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머리 부분을 쏘는 것이 가장 확실한데, 허 일병은 ‘우측가슴-좌측가슴-머리’에 3발이나 쐈다.
6. 국방부는 총성 3발이 들렸다고 했으나, 주변인들은 총성 2발만 들었다고 증언했다. 현장에서 2개의 탄피만 발견됐다. 나머지 탄피의 행방은?
7. 당시 허원근 일병과 사건관련자의 총번이 모두 수정됐다. 이에 대해 총기감식관은 “수사절차상의 하자가 아니라 총기가 바뀐 것”이라고 했으나 허 일병의 총기라고 확정할 수 없다는 의문이 제기됐다. 그럼 누구의 총?
8. 헌병대 수사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진 2장이 특조단의 기록 속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현장사진 2장을 누가, 어떻게, 어디서 입수했는지 아직까지도 밝히지 않고 있다.